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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한산 : 용의 출현] 전역 해군장교의 감상과 실제 역사 알아보기 (스포주의) (with 이순신 평전)

C빌런 2022. 8. 1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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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 : 용의 출현' 영화가 7월 27일 개봉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누적 관객수 600만명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해서 어제 영화를 보고 왔다. 지난 영화 '명량'도 영화관에서 감상했는데, 역시 해상전의 연출과 장엄한 배경음악은 관객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만드는 마성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명량'에 비해 영화를 감상하는데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했다. 과도한 '국뽕'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억지에 가까운 '이순신앙', '거북신앙'은 영화 몰입을 저해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은 것은 이순신 장군을 닿을 수 없는 성웅에서 확실히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느낌을 받은 것에 있다.

  '한산 : 용의 출현' 에서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고뇌하는 전능한 영웅을 강조하기 보다 결전을 앞둔 군대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군은 지휘관을 보좌하는 참모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 역할 중 지휘관이 최상의 결정을 하도록 조력하는 것이 있는데, 참모들이 지휘관의 결정에 반박하거나 더 나은 결정을 하도록 유도하려면 지휘관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지식과 전술 이해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 이순신 장군(박해일)은 '적에게 노출된 거북선의 문제점', '출동 일자에 맞추어 신형 거북선의 제작이 완성되기 어려운 상황'을 인지하고, 진법에서 필요성을 느끼나 전력에서 '거북선'을 제외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전라우수사 이억기(공명)', '군관 나대용(박지환)'은 오히려 학익진을 위해서는 거북선의 역할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이순신 장군에게 강조하며 결정을 재고할 것을 권고했다.

  그들 역시 빠른 속력을 가진 일본 전함들을 상대로 학익진의 완성 시간을 벌려면,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고 지연시키는 '거북선'의 전술적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모진과 똑같은 갑옷을 입은 채 소통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영웅이 아닌 조선 수군으로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잘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이와 연계해서 '학익진'의 완성도와 맹점을 파악하기 위해 연합함대가 모여 훈련하는 모습을 별도로 보여준 장면에서도 조선수군은 준비 안 해도 잘 싸우는 무적이 아니라 완벽한 전투를 위해 노력하는 흔한 군대라는 것을 잘 표현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영화에 몰입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다. 이순신 개인이 아닌 모든 사람이 노력한 전쟁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웅치 전투'에서 의병장 '황박'이 분투하는 장면을 넣은 것은 좋았으나, 본 지 얼마 안된 항왜 '준사'와의 과도한 전우애를 연출하는 것은 공감이 되지 않는다. 해전 승전 후 '옥택연'씨와 '김향기'씨의 해후 장면 역시 영화의 흐름에서 필요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흥미로운 몇가지 역사적 사실」

  '한산 : 용의 출현'에서 강조하며 보여주고자 한 것들은 '이순신의 전쟁' 아닌 '모두의 전쟁'이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듯하다. 실제 역사에서는 어땠을지 궁금해서 한 권의 책을 통해 궁금증을 해소해 보았다.

  '이순신'분야의 전문가이자 사관학교 생도시절 교수님이기도 하신 분의 저서이다. 수강시간에는 피곤함에 찌들어 대부분 잠을 잤지만,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니 의외로 재미있게 읽혔다. 역사적 사실에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사실 ① : '웅치 전투'는 한산도 해전 당일에 벌어지지 않았으며, 일본군의 목적은 '전라좌수영'이 아니라 '전주성'이었다.
- '한산도 해전'은 1592년 7월 8일, '웅치 전투'는 1592년 8월 13일에 일어났다. 영화적 연출을 위해 끼워 맞춘 듯하다.

사실 ② : 일본 수군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한산도 해전'에서 '가토 요시아키'는 다음 해전인 '안골포 해전'에서 박살이 났다.
- 영화에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가토 요시아키'의 뒤통수를 치고 함선들을 뺐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실과 다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연합하지 않고 먼저 단독으로 출정을 했으며, '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유인작전에 쉽게 낚여서 개박살이 났다(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지능 싸움은 영화적 연출). '가토 요시아키'는 안골포에서 정박 중 이순신의 조선수군을 만나 박살이 난다.

사실 ③ : '한산도 해전' 발생 전 '당포'에 정박한 조선수군은 코앞인 '견내량'에 정박한 일본 수군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으며, 이 사실은 피난 가던 마을사람을 통해 알게 되었다.
- 일본군을 피해 피난 가던 미륵도에 사는 '김천손'씨가 산 정상에 올라서 바다를 보자, 산을 기준으로 한 쪽에는 '일본 수군'이 반대편에는 '조선 수군' 정박한 것을 보고 신고를 했다고 한다. 반면 일본수군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간첩'을 통해 상대방의 위치를 아는 것은 영화적 연출을 위한 것으로 보이며, 부족한 정보를 보충하기 위해 조선수군은 피난가던 연해민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대해 포상하고 지원함으로써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실 ④ : 실제로 '한산도 해전'에서는 일본 수군이 학익진에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시에 소탕한 것으로 추정된다.
- 원거리 무기에는 '최대사거리'와 '유효사거리'가 존재한다. '유효사거리'는 표적을 맞출 수 있는 거리를 말하며, 당시 조선수군의 '화포' 유효사거리는 50m 내외로 추정된다. 그렇기에 영화적 연출과 비슷하게 지근거리에서 각종 화포와 화살로 일제 공격하여 실제 전투시간은 길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⑤ : 조선은 일본과의 전쟁을 예견하고 전쟁준비를 하긴 했다.
- 여태까지 보아온 임진왜란의 조선은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가 아무런 준비도 안 하다가 당한 것으로 표현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 임진왜란 발발 전 조선 전체가 전쟁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조선 조정은'유성룡' 같은 문관들을 필두로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경계했으며, 몇 가지 조치를 시행한다.
1) 각 지방의 군사적 대응능력을 높이기 위해 유능한 지휘관들로 교체하는 대대적인 인선을 진행했다. 이순신 장군은 파격적인 인사의 최대 수혜자이다(45세 정읍현감(작은 마을 관리) → 47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함대사령관)).
2) 3번의 큰 왜구 침략(삼포 왜변, 사량진왜변, 을묘왜변)을 겪고, 조선 조정은 수군 강화에 대한 필요성을 인지했다. 임진왜란 발발 30년 전에 조선수군의 주력 군선인 '판옥선'을 개발하고 각종 '총통'의 무기체계 편성을 완료하였다.
- 그러나 왕조 탄생 후 200년간 이어진 평화로 인해 병역에 대한 감시가 소홀했다. 이는 '군역'에 명단만 올리고 사람은 없는 병역 문란의 형태로 방치되었으며, 임진왜란 초기 조선 정규군의 숫자가 매우 부족하게 된 계기가 된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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